1604년 영국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체포돼 끔찍한 처형을 당했던 인물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화끈한 테러’를 저지르는 영화 속 의문의 사나이는 ‘V’라는 이니셜로만 통한다. 그렇다면 V가 의미하는 건 뭘까. victory(승리), vision(미래의 제시), victim(희생자), vestige(과거의 흔적ㆍ상처) 중 하나일까.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의 행적을 보노라면 그의 이니셜 V는 victory, vision, victim, vestige 모두가 될 수 있을 듯하다. V의 투쟁은 자유의 승리(victory)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억압된 체제에 의해 상처받은(ves tige) 희생자(victim)의 분노일 수도 있다. 다른 면에선 억압적인 체제를 부수고 진정한 자유를 향하는 비전(vision)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모두 V의 과격한 테러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명분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독자와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원천봉쇄하기라도 하듯 V는 victory나 vision, victim이 아니라 ‘vendetta(복수)’를 의미한다고 제목에서부터 밝히고 들어간다(V for Vendetta).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소설에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은 V라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이지만 ‘얼굴’이 없다. 첫 등장에서 마지막 죽음까지 마스크 속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주인공의 캐릭터를 V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상징성으로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V의 마스크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얀 얼굴에 볼은 분홍빛이다. 콧수염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고, 턱수염 역시 아래로 날카로운 칼처럼 내리꽂혀 있다. 웃는 얼굴 같기는 한데,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느낌이다. 영화의 ‘얼굴’ 역할을 하는 가이 포크스라는 인물은 1605년 영국 제임스 1세의 가톨릭 탄압 정책에 항거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 국회의사당 상원 건물을 국회 개원 날 폭약으로 ‘날려 버리려 했던’ 무척이나 과격했던 인물이다. 감히 국왕과 영국 귀족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려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을 의사당 건물 지하에 쌓아놓았다가 적발됐으니 그 처벌 수위가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에겐 ‘Hanged, Draws, Quartered(목매달고, 끄집어내고, 토막내기)’라는 설명하기조차 끔찍한 왕정 시대 영국법이 정한 최악의 형벌에 처해진다. 일단 교수형에 처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ㆍ2005)’는 제임스 맥테이그(Jaems McTeigue)라는 생소한 이름의 감독의 데뷔작이자 아직까지는 그의 인생작인 듯하다. 앨런 무어(Allan Moore)라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 만화를 그 유명한 워쇼스키 자매가 영화각본으로 재탄생시켰다. 제임스 맥테이그는 ‘매트릭스’ 시리즈에 조감독으로 참여해 워쇼스키 자매와 인연을 맺었다. 영화는 2005년에 제작됐지만 앨런 무어의 원작만화는 1988년도 작품이다. 당시는 소련이 해체(1989년) 되기 전으로, 세상은 여전히 핵전쟁의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영국에선 보수당 정권(마가렛 대처 수상)이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극우 정치노선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디스토피아 작가들이 그려내는 미래상은 언제나 ‘현재’의 세상에서 그 암담한 미래상의 ‘조짐’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어쩌면 디스토피아 작가들은 「25시」를 쓴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들은 항해를 떠날 때 항상 잠수함에 토끼 몇마리를 태웠다. 토끼가 사람들보다 ‘산소 부족’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승무원들은 멀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와 아들 코모두스라는 2명의 황제를 보여준다. 철학가 뺨치는 지혜를 뽐냈던 아우렐리우스가 ‘정치가(statesman)’라면, 아버지를 목졸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코모두스는 전형적인 ‘정치인(politician)’이다. 그럼 정치가와 정치인의 차이는 뭘까. 정치인은 정치를 입신양명과 부귀영화의 통로로 사용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즐긴다. 반면 정치가는 공동체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그 비전을 실현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크기만큼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정치가는 고통스러워도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3가지 성격의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타협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 아무 걱정 없겠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픈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보통 사람이 아닌 권력자가 ‘해야만 하는 일’을 외면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매달
막시무스에게 코모두스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코모두스는 막시무스가 아버지처럼 모신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막시무스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까지 불태워 죽인다. 막시무스는 하루아침에 로마 최고의 장군에서 노예검투사로 전락한다. 코모두스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사내의 처절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볼 때 한가지 짚어볼 게 있다. 막시무스의 불행은 모두 코모두스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라 해도 직접적 원인은 코모두스가 제공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간접 원인들은 따로 있다. ‘간접 원인’이 없었으면 ‘직접 원인’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게 ‘진짜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 막시무스를 불행으로 이끈 간접 원인은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사태를 만든 ‘간접 원인’은 어쩌면 게르만족의 침입이었을 듯하다. 북방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막시무스는 로마 최고의 장군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역시 아들 코모두스를 제쳐두고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찜’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게르만의 침략을 당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코모두스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막시무스
코모두스 황제와 노예검투사 막시무스는 AD 180년 어느날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한복판에 서서 수만명의 군중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결국 두 사람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맞서고 그렇게 죽게 됐을까. 누구 탓일까. 대중예술에서 극작가와 감독의 시선은 주인공 편향적이고 선악善惡 대결구도에 맞춰져야 한다. 영웅은 절대선이어야 하고, 빌런은 절대악이어야 한다. 막시무스는 강직하고 사심 없고 당당하다. 반면 코모두스는 무능하고 욕심 많고 사악하기 짝이 없다. 막시무스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의 ‘공공의 적’으로 자리매김한다. 코모두스를 향한 막시무스의 사무친 원한에 모든 관객이 공감한다. 코모두스를 죽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복수심도 수긍이 간다. 막시무스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살해하고 자신의 처자식마저 불태워 죽인 원수가 코모두스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내 처자식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카메라도 막시무스의 영웅적인 전투와 일편단심 로마와 황제를 향한 충절, 그리고 막시무스의 아내와 아들이 나무에 매달려 불타 죽은 모습에 막시무스가 처절하게 절규하는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로마의 심장 콜로세움에 노예검투사로 등장한 막시무스는 한순간에 코모두스 황제를 정치적 곤경에 빠트린다. 코모두스는 황제의 권능으로 노예검투사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다. 권력이란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것이다. 뒤집어지는 바다에서는 항공모함도 견딜 수 없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막시무스가 등장하자 잔잔하던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권력을 받치고 있는 원로원에도 거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코모두스가 못마땅했던 로마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루실라 공주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노예 검투사 하나를 처형해버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이 시민들이 열광하는 노예검투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마도 민심의 바다가 뒤집힐 것이다. 헌법 위에 있는 것이 ‘국민정서법’이다. ‘절대적’으로 보였던 역사상 수많은 권력들이 그렇게 무너졌다. ‘절대권력’이란 없다. 교도소장도 수감자들이 뭔가 빈정 상해서 모두 들고 일어나면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국민정서법’에 걸리지 않고 막시무스를 제거해야 한다. 코모두스가 찾아낸 방법은 ‘결투’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아이디어이다. 아직 로마에 ‘결투’라는 제도가 도
막시무스의 등장으로 촉발된 코모두스 황제의 정치적 위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 좋은 책사 팔코 의원의 계략에 따라 로마 북부군과 원로원, 누이 루실라까지 가담한 쿠데타 음모를 겨우 막아내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는 한 파도는 계속 밀려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코모두스. 이제 어느 파도에 그의 배가 뒤집힐지 알 수 없다.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이고, 바람은 곧 민심이다. 콜로세움에 모인 군중들의 목소리가 민심을 대변한다면 민심이라는 바람은 이미 그에게서 돌아선 것이 분명하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명쾌하게 정리한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한시외전(韓詩外傳)」은 권력과 민심의 단순명쾌한 관계를 이렇게 규정한다. “임금은 백성이 함께하면 편안하고, 백성이 도와주면 강해진다. 그러나 백성이 얼굴을 돌리면 위태로워지고, 백성이 등을 돌리면 끝이다(百姓與之卽安 輔之則强 非之則危 背之則亡).” 민심을 얻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고 민심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뜻이다. 지금 코모두스를 향한 로마의 민심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지금이야 얼굴 정도지만, 언젠가는 완전히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럴 땐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죽이고 ‘셀프 황제’ 자리에 올라 돌아온 코모두스를 맞은 로마의 ‘민심民心’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민심은 천심(天心)이라는데, 민심이 그리도 변덕스러운 것이라면 천심도 그렇게 변덕스러운 것인가 보다. 로마로 입성하는 코모두스를 시민들은 침묵 속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맞는다. 찬바람이 싸하다. 그랬던 로마 시민들은 코모두스 황제가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폐지해버렸던 콜로세움 검투경기를 부활시켜 신나는 ‘즐길거리’를 제공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펴고 환호한다. 손을 흔들며 콜로세움 경기장에 입장하는 코모두스를 향해 야유 대신 환호를 보낸다. 능라도 경기장에 입장하는 김정은을 향해 열광하는 평양시민들의 모습이다. 찬바람은 그렇게 봄바람으로 바뀐다. 눈 녹듯 녹은 민심 덕분에 자리를 잡을 것 같았던 코모두스의 치세는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검투 노예’ 막시무스 한명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뒤집힌다. 그러자 봄바람으로 변했던 민심이 찬바람을 넘어 광풍으로 돌변한다. 황제에게 열광했던 시민들이 한순간에 변해서 황제를 죽이러 돌아온 막시무스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코모두스의 몰락을 갈망하던 ‘민심’도 잠시뿐이다. 정작 코모두
코모두스는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목졸라 죽이는 ‘궁중 정변’을 저질러 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최악의 쿠데타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부자관계는 항상 아슬아슬하다.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 권력이다. 그만큼 권력은 살벌하고 무서운 거다. 아무리 부자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는 황제의 막사에서 황태자가 황제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할 듯하다. 권력자의 주변 인물들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모두 침묵한다. 황태자인 코모두스가 결국 새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침묵하기도 하고, 무력감에 침묵하기도 하고, 괜히 입을 놀렸다가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눈을 감기도 하고, 새 황제의 시대에 새로운 기회를 기대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모두 그렇게 침묵하는 가운데 코모두스의 ‘어쩌다 쿠데타’는 정말 성공한다. 불의(不義)한 권력 탄생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말에 오를 정도로 연로하며, 전쟁을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면서 진저리를 치는 데다 철학이 본업인 듯한 황제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야 부와 권력이 커지는 군부에서 환영받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막시무
영화 ‘글래디에이터’ 최고의 빌런은 분명 코모두스인데, 다른 영화들의 ‘빌런’들과는 달리 괜히 짠한 느낌이 든다. 코모두스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의 느낌 자체가 왠지 쓸쓸하고 슬퍼보여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코모두스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강 헤아려 보아도 다섯번의 ‘배신’에 놀라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좌절하고 분노한다. 세상의 이치라는 게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또 다른 원인이 되는 것이라면 코모두스는 ‘빌런’이기 때문에 배신당하고, 배신당해서 더욱 ‘빌런’이 되는 듯하다. 굳이 분류하자면 코모두스는 ‘안습형 빌런’이다. ■배신❶ = 게르만과의 처절한 전투가 다 끝나서야 전선에 도착한 코모두스는 막시무스 장군에게 ‘내가 다음 황제가 됐을 때도 지금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처럼 충성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막시무스는 코모두스의 진정 어린 부탁에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고 코모두스 황태자의 청을 거절한다. 막시무스를 형제처럼 아끼고 가깝다고 믿어왔던 코모두스에게는 더 이상 당황스러울 수 없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진다. ■배신❷ =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와 함께 음산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어디쯤에서 게르만과의 전투를 지휘해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황태자 코모두스는 전투가 끝난 뒤에야 전선에 도착해 설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코모두스에게 “황제 자리를 막시무스에게 물려준다”고 통보한다. 분노한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인다. 아버지와 막시무스가 이뤄낸 승리의 영광을 모두 가로챈 코모두스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꽃을 뿌리며 로마로 개선한다. 그러나 길에 늘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냉랭하다. 몇몇은 난생처음 보는 불쾌하고 불길한 짐승을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코모두스의 로마 입성 장면을 잿빛으로 처리한다. 분명 화창한 날씨인데 화면은 음산하다. 잿빛 화면 속에 흩날리는 붉은 꽃잎들이 방사능 낙진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다. 코모두스는 원로원 앞에서 마차에서 내린다. 새 황제를 맞이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표정은 시민들만큼이나 떨떠름하다. 코모두스는 족히 50여개는 돼 보이는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원로원 의원들은 까마득한 계단 위 입구에서 새 황제 코모두스를 기다린다. 아무도 계단을 내려가 황제를 맞이하거나 에스코트하지